각주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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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 태준

상하이 첫날

상하이 푸동공항은 컸다. 천장이 높고 사람도 많았다. 중국어와 영어로 안내방송이 나왔다. 한국어도 나왔다. 상하이가 한국 여행객도 많은 도시라는 걸 태준은 공항에서 실감했다.

입국 심사대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 승필이는 환율을 계산했다. 경환이는 맛집 리스트를 읽었다. 태준은 줄을 서면서 앞사람 등을 봤다. 제복을 입은 공안이 2번 창구를 가리켰다. 심사관이 여권을 받아 펼쳤다. 여권 사진과 태준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무언가 말했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잠시 후 어떻게 왔는지, 며칠 있을 예정인지 영어로 물었다.

"트래블. 포 데이즈."

짐을 찾고 나왔다. 공항 밖은 차가웠다. 한국보다 기온은 높았지만 공기는 더 차가웠다.

"여기 왜 이렇게 춥지?" 승필이 옷깃을 여몄다.

와이탄 강변
와이탄에서 바라본 황푸강과 푸동

"중국이잖아." 경환이 대답했다.

중국이라서 춥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에 넣어둔 목도리를 둘렀다. 찬 공기의 느낌이 낯설었다. 얇은 바지로 파고드는 한기는 한국과 달랐다.

택시를 탔다.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달려 상하이 외곽에서 시내로 들어갔다.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불빛이 점점 늘어났다. 높은 건물들이 불을 켜고 있었다. 서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넓은 도로를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왔다. 택시가 멈췄다. 숙소 골목이 좁아 택시가 들어가지 못했다. 승필이는 캐리어를 꺼내고 경환이는 지도를 열었다.

캐리어를 끌고 걸어 들어갔다. 돌바닥이었다. 바퀴가 덜컹덜컹 굴렀다. 숙소는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중정이 있었다. 창밖으로 빨래가 널려 있었다. 밤이라 어두웠지만 사진에서 보던 것과 같았다.

"경환아, 여기 맞아?" 승필이가 물었다.

"봐, 사진하고 똑같잖아." 경환이가 대답했다.

딱히 로비라고 할 곳은 없었다. 작은 탁자에서 체크인을 했다.. 좁은 계단을 올라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침대가 세 개 나란히 있었다. 방에서는 낯선 향이 났다.

비행기에서 마신 맥주로 취기가 오른 승필과 경환은 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태준도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이 낯설었다. 약간 노란빛의 조명도, 벽에 밴 모르는 사람 냄새도, 창밖으로 들리는 말소리도 전부 낯설었다.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는 게 그제야 실감 났다. 낯선 곳이었다. 처음 와본 곳이었지만 이상하게 편했다.

첫날 일정은 와이탄이었다. 황푸강 변을 따라 늘어선 유럽풍 건물들. 강 건너로 푸동의 고층 빌딩이 보였다. 낮에 보는 상하이는 높고 밝고 자신만만했다. 경환이는 폰을 세로로 들었다 가로로 들었다 사진을 찍었다. 태준이도 카메라를 꺼냈다. 강 건너 마천루들을 화면에 담았다. 어디에 쓸지 모르지만 셔터를 눌렀다. 잘 나왔는지는 보지 않았다.

강변을 따라 걸었다. 사람이 많았다. 여행객과 현지인이 섞여 있었다. 들리는 말도 여러 가지였다. 중국어, 영어, 일본어, 한국어도 들렸다. 승필이 태준 옆으로 왔다.

"야, 어떠냐? 재미있냐?"

"응." 태준이 대답했다.

"응? 여기까지 와서 '응' 한마디로 끝낼 거냐?"

"응."

승필이 태준을 봤다.

1933 라오창팡
1933 — 옛 도살장 건물

"넌 여행 와서도 이러면 어떡하냐?"

"어떡하긴. 난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다녀."

"내가 재미없으면 나도 재미없잖아."

태준이 승필을 봤다. 이 친구는 대학 때부터 그랬다. 자기가 재미있어도 다른 사람이 재미없으면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태준은 가끔 부담스러웠다. 재미없어도 괜찮은데. 나는 그냥 있으면 있는 건데.

"나 재미있어."

"표정이 그렇지 않은데?"

"이게 내 재미있는 표정이야."

승필이 피식 웃었다.

"그래, 넌 원래 그랬어. 대학 때부터 재밌는 표정이랑 안 재밌는 표정이 똑같아서 구분이 안 갔다."

태준은 그 말을 들으며 강을 봤다. 똑같다. 표정이 똑같다. 맞는 말이었다. 재밌을 때랑 재미없을 때랑 똑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느낄 때 그것이 온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느낌이 밋밋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부터인지, 아니면 더 전부터인지.

경환이가 찾아놓은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은 시끄러웠다. 원형 테이블에 회전판이 있는 곳이었다. 경환이가 회전판을 돌리면서 설명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태준은 앞으로 오는 음식을 덜어 먹었다. 맛있었다. 맛있다는 걸 알면서 먹었는데 잘 모르겠었다.

"태준아, 맛있냐?" 경환이가 물었다.

"응. 왜?"

"계속 멍하게 있는 것 같아서."

"여행 와서까지 회사 생각하냐?" 승필이 거들었다.

태준은 물을 마셨다. 회사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아무 생각도 안 했다는 게 맞았다.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같은 걸 보고 있다는 건 알았다. 멍하다는 것. 그건 둘 다 느끼는 것이었다.

오후에는 예원에 갔다. 명나라 때 만들어진 정원이라고 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만든 정원이라고 했다. 정원 밖은 상점이 줄지어 흥정하는 소리가 컸지만 정원 안은 조용했다. 태준은 그곳을 걸으며 지금 밟고 있는 돌이 몇백 년 된 돌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다는 건 떠오르지 않았다. 몇백 년 동안 사람들이 밟고 지나갔다는 것.

경환이 연못 앞에서 잉어를 가리켰다. 큰 잉어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형형색색 밝은 색이었다. 태준은 잉어를 바라봤다. 천천히 유영하는 잉어. 오래된 연못 안에서, 몇백 년 된 정원 안에서, 이 잉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겠지. 그냥 헤엄치겠지. 그곳이 자기 세상이니까. 그게 좋아 보였다.

세상이 작아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그냥 헤엄치는 것.

저녁에 숙소 근처로 돌아왔다. 작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맥주가 나왔다. 경환이 잔을 들었다.

"첫날이다. 건배."

셋이 잔을 부딪쳤다. 괜찮은 저녁이었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것을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여행이었다. 그런데 태준은 내내 혼자 있는 것 같았다. 웃음소리가 조금 멀리서 들렸다. 자기가 웃고 있는 건데 그 웃음이 자기 것 같지 않았다. 이 감각을 설명한 적이 없었다. 설명할 말을 몰랐고 설명해봤자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갔다. 창밖으로 널린 빨래는 아직 그대로였다. 좁은 계단을 올라 방으로 들어갔다. 승필이는 숙취에 침대에 쓰러졌다. 경환이는 낮에 사 온 선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태준은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골목은 조용했다. 낮에 왁자지껄하던 상하이가 밤이 되면 이런 골목에 숨어버리는 것 같았다. 건물은 낡았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담벼락. 불 켜진 이층집. 거기서 새어 나오는 빨간 조명.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지나갔다.

태준은 방향 없이 걸었다. 발이 가는 대로, 골목이 꺾이는 대로. 담배 연기가 났다가 사라졌다. 어떤 집 창문 너머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였다. 그게 좋았다.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 여기서는 간판도 모르고 말도 모르고 아무도 자기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른다는 것. 중소기업 4년 차도 아니고, 아버지 없이 큰 사람도 아니고,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 대답해야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여기 있는 사람. 이름도 없이, 이유도 없이.

낡은 골목의 그림자가 더 짙어질 때쯤 태준의 발이 멈췄다.

눈앞에 검은 건물이 서 있었다. 높고 무거웠다. 불이 몇 군데 켜져 있었지만 밝아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도 되는 곳인지 알 수 없었다.

1933老场坊.

1933년에 지어진 상하이의 옛 도살장.

태준은 그 단어를 한 번 더 읽었다.

도살장.

건물의 윤곽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 안쪽으로 이어진 통로. 위아래로 엇갈린 계단과 경사로. 그것들이 그냥 장식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래전 지나간 무언가가 아직 벽 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무섭다고 하기엔 조금 궁금했고, 멋있다고 하기엔 어딘가 불편했다.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눈을 떼기 어려웠다.

태준은 한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건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창밖에서 무언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승필이의 숨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친구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폰을 들었다. 단톡방 알림이 몇 개 쌓여 있었다. 승필이 낮에 보낸 사진, 경환이가 찾아놓은 식당 리스트, 쇼핑 리스트. 어머니에게서 온 문자도 있었다. "밥은 먹었니?" 문장은 짧았다. 어떻게 답장할까 생각하니 화면이 금방 어두워졌다. 답장을 쓰려다 멈췄다. 폰을 엎어두고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은 멀리 있었다. 옆에서 누군가 잠꼬대하는 소리가 났다. 천장은 어두웠다. 그 어둠을 보면서 잤는지 안 잤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 끊긴 것 같기도 하고, 내내 깨어 있는 것과 자는 것 사이 어딘가로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