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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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 태준

골목 안쪽

눈을 떴다. 햇살이 눈부셨다. 한국에서 검색한 날씨는 비였는데 창밖은 맑았다.

경환이는 일정을 떠들었다. 승필이는 일정표를 봤다.

"난 오늘도 혼자 갈 데가 있어."

태준의 말에 방 안의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또?" 경환이가 물었다.

상하이 옛 골목
빨래가 널린 롱탕 안쪽

승필이 일정표를 내려놨다.

"어제도 혼자 갔잖아."

"응."

"같이 다니면 좋잖아."

"미안. 혼자 가고 싶어."

승필이 태준을 봤다.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제와는 다른 침묵이었다. 어제는 그냥 아쉬운 거였고 오늘은 무언가 더 얹혀 있었다.

"너 가자고 한 게 누군데." 승필이 말했다. 화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더 걸렸다.

"……미안."

"비행기도 우리가 예약하고 숙소도 우리가 잡고. 너 사진이나 찍으라고 데려왔더니. 정작 같이 있는 시간이 없네."

태준은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무언가 설명하고 싶었는데 설명할 말이 없었다. 어제 만난 사람, 진짜 상하이, 번호도 없는 약속. 입 밖에 내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경환이가 가방을 챙기며 끼어들었다.

"됐어. 쟤 원래 저러잖아. 모처럼 뭐 하고 싶다는데 하게 둬." 그러고는 태준을 봤다. "저녁은 같이 먹자. 내가 또 찾아놨어."

"그래." 태준이 대답했다.

승필이 먼저 문으로 갔다. 신발을 신었다. 문을 열다가 멈췄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혼자 다니다 또 길 잃지 말고."

문이 닫혔다. 마지막 말에 농담의 톤이 있었지만 끝이 조금 무거웠다. 태준은 미안한 마음이 늦게 올라왔다. 늘 그랬다. 감정이 한 박자 뒤에 왔다.

방이 조용해졌다. 어제 마신 맥주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태준은 폰을 봤다. 열 시. 점심때라고만 했다. 몇 시인지는 몰랐다. 웨이린의 번호도 없었다. 물어볼 수 없었다. 일찍 가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올까. 어제 슈퍼 앞에서 한 약속이었다. 술기운에 한 말일 수도 있었다. 카페 앞, 점심때. 그게 다였다. 약속이라고 부르기에는 헐거웠다. 그래도 가기로 했다. 안 오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카메라를 챙겼다. 렌즈를 닦았다. 가방을 멨다.

골목으로 나섰다. 햇빛이 좁은 바닥까지 내려와 있었다. 어제는 길을 잃었다. 오늘은 일찍 나섰다. 만두 가게를 지났다. 김이 유리창을 하얗게 흐리고 있었다. 빨간 조명 집을 지났다. 계단을 내려갔다. 어제보다 빨랐다.

1933老场坊.

오늘은 어제와 또 달랐다. 사람이 많았다. 카페 앞에 섰다. 노란 불빛은 그대로였다. 안에 웨이린은 없었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했다. 아직 점심때도 아니었다.

태준은 카페가 보이는 자리에 섰다. 기다렸다. 카메라를 들었다. 통로를 찍었다. 기둥을 찍었다. 찍으면서도 자꾸 입구를 봤다.

열한 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웨이린은 오지 않았다.

바람이 찼다. 목도리를 여몄다. 시간을 잘못 안 걸까. 장소를 잘못 안 걸까. 번호가 있었다면 물어봤을 텐데. 안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냥 사진이나 찍다 돌아가면 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렸다. 웨이린은 오지 않았다.

배가 고팠다. 어제저녁 뒤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골목에 만두 가게가 있었다. 어젯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지나친 가게였다. 김이 유리창을 하얗게 흐리고 있었다. 안은 한 번도 들여다본 적 없었다.

들어갔다. 좁았다. 테이블이 네 개였다. 노인이 만두를 빚고 있었다. 메뉴를 읽을 수 없었다.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대나무 찜통에 담긴 만두 같은 걸 시켰다. 문 쪽 자리에 앉았다. 거기서 골목이 보였다. 웨이린이 오면 보일 수도 있는 자리였다.

만두가 나왔다. 김이 올라왔다. 젓가락으로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뜨거웠다. 입천장이 데었다. 찜통을 내려놓고 골목을 봤다. 만두가 식기를 기다렸다. 골목에는 사람이 드물게 지나갔다. 웨이린은 없었다.

식은 만두를 먹었다. 안에 든 국물은 미지근했다. 그래도 따뜻했다. 혼자였다. 문 쪽 자리에서 식은 만두를 먹으며 빈 골목을 봤다.

골목 끝에 웨이린이 나타났다.

시계를 봤다. 열두 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태준은 만두 가게에서 나왔다.

"늦어서 미안해요." 웨이린이 말했다. "할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셔서."

"괜찮아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뇨."

기다렸다. 두 시간 가까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웨이린이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가요. 진짜 상하이."

웨이린이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태준이 따라갔다.

길이 좁아졌다.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낮은 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벗겨진 담. 처마 밑에 널린 빨래. 창틀에 걸린 새장. 화분 사이에 세워둔 자전거.

평상에 앉은 노인이 웨이린에게 뭐라고 했다. 웨이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태준은 알아듣지 못했다.

어디선가 기름 냄새가 났다.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골목 끝에서 아이가 뛰어왔다. 웨이린이 앞서 걸었다. 막힘이 없었다. 여기서 갈라지고 저기서 꺾이는 길을 다 알고 있었다.

"저쪽에서 자랐어요." 웨이린이 한쪽을 가리켰다.

어제 태준은 이 골목에서 길을 잃었다. 오늘은 잃지 않았다. 앞에 웨이린이 있었다.

태준은 카메라를 들었다. 담벼락을 찍었다. 빨래를 찍었다. 새장을 찍었다. 골목 끝으로 떨어지는 빛을 찍었다. 웨이린을 돌아봤다. 카메라가 그쪽을 향해 있었다.

"저요?"

"아…… 뒤에 빨래가."

웨이린이 웃었다. 그대로 서 있었다. 태준은 셔터를 눌렀다.

"여기 곧 없어져요." 웨이린이 말했다.

"없어져요?"

"재개발. 내년이면 다 헐려요." 웨이린이 골목을 둘러봤다. "여기도, 할머니 집도, 다."

태준은 오래된 골목을 봤다. 곧 사라질 골목이었다. 카메라를 다시 들었다. 아까보다 천천히 찍었다. 사라질 것을 찍고 있었다. 웨이린이 다시 앞서 걸었다. 사라질 골목이 그 뒤로 펼쳐져 있었다.

태준은 카메라를 들었다. 골목을 찍으려고 했다. 화면 안으로 웨이린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내리지 않았다. 셔터를 눌렀다.

웨이린은 알지 못했다. 계속 걸었다.

태준은 카메라를 내렸다. 웨이린의 뒷모습은 그대로였다. 화면 속에도, 골목에도.

화면을 넘겨 봤다. 담벼락. 빨래. 새장. 빛. 그리고 웨이린.

찍은 것을 다시 본 건 오랜만이었다.

태준은 고개를 들었다. 웨이린은 아직 앞에 있었다. 골목이 끝났다. 큰길이 나왔다.

웨이린이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가볼래요?"

웨이린이 길을 건넜다. 태준이 따라갔다. 문 옆에 낡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홍덕당이에요." 웨이린이 말했다. "오래된 교회예요."

앞마당에 노인들이 모여 있었다.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작은 항아리였다. 그 안에서 귀뚜라미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다.